– 실재를 포기한 수식들
🕰️ 1927년 10월 27일 오후 1시 45분
📍브뤼셀, 솔베이 회의장 2층 소회의실

점심 식사 후 소수의 인물들이 따로 모였다.
주제는 예정된 논문 발표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문제 제기에 대한 비공식 토론이었다.
소회의실에는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파울리, 드브로이, 로런츠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회장을 잠시 비운 드바이와 랑쥐뱅은 참가하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지도, 수식, 발표 노트, 커피잔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정리하지 않았다.
이 방 안의 공기는 계산보다 더 복잡한 철학적 전류로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말하겠소.”
아인슈타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단단했다.
“양자역학은 계산에서 성공했지만,
그 설명은 실패했습니다.
실재라는 개념은, 이론에서 제거되어선 안 됩니다.”¹
“하지만 ‘실재’라는 단어는 추상적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우리가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을 이론에 넣는 건,
물리학을 형이상학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슈뢰딩거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양자역학은 물리학이 아니라,
측정학에 불과하다는 말입니까?”
“당신들의 해석은 계산에는 유효하지만,
세계에 대한 이해는 전혀 제공하지 않아요.”²
보어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듣고 있었다.
파울리는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우리는 실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식을 정리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과학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 다음 조용히 말했다.
“만약 당신들의 말이 옳다면,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책상도 확률적으로 존재할 뿐이며,
나의 존재도 단지 관측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라는 말입니까?”³
하이젠베르크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정확히 그렇습니다.
파동함수는 붕괴되고, 관측이 행해지는 순간에
실재는 확정됩니다.”
그 순간 슈뢰딩거는 조용히 책상 아래에서
작은 메모장을 꺼냈다.
그가 그려둔 고양이 사고실험의 초안을
아인슈타인 쪽으로 밀었다.
“이 고양이는, 당신의 논리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당신들의 해석을 붕괴시키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문제는,” 아인슈타인이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 고양이가 실제로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상상 속의 고양이가 아니라,
진짜 상자 안의 생명이라는 점입니다.”
정적.
파울리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들고 있군요.”
“당신들이 물리학을 철학에서 도망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문장에 보어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박사님, 실재란 우리가 정의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관측자 중심의, 현대 물리학의 유일한 입장입니다.”⁴
“그것이 바로 내가 반대하는 지점입니다.”
“우리가 정의하지 않아도, 세계는 존재해야 합니다.”
그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과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그림자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일 뿐입니다.”
이 대화는 회의록에 정식으로 남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아인슈타인은 확신했다.
숨은 변수라는 개념은 상상력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 주석
[1] 아인슈타인은 여러 문헌에서 양자역학의 “완전성”을 부정하며,
“물리학은 실재를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밝혔다.
[2] 슈뢰딩거는 평생에 걸쳐 양자역학의 해석을 비판하며
‘파동 방정식’은 유지하되, 코펜하겐 해석에는 반대했다.
[3] 이 발언은 아인슈타인의 회의 당시 직접적 표현은 아니지만,
그의 수많은 편지와 논문을 통해 반복된 철학적 핵심이다.
[4] 보어의 관측자 중심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의 정수다.
이는 ‘존재란 관측을 통해 정의된다’는 사고로 연결된다.
– 끝나지 않는 물음표
🕰️ 1927년 10월 27일 오후 4시 15분
📍솔베이 연구소 뒤뜰의 벤치, 뉘엿해진 하늘 아래
회의장 안의 토론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연구소 뒤뜰엔 붉은 석양이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책 몇 권과 노트를 안고,
돌길을 따라 조용히 걸었다.
나무 벤치에 도착해 앉았을 때,
그는 모자도, 외투도 벗은 채였다.
마치 오래된 질문 하나를 꺼내놓기 위해
모든 외형을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릎 위에 노트를 펼쳤다.
그 위에는 진즉 써두었던 한 문장이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다음 문장이 덧붙여져 있었다.
“나는 아직 그 주사위의 위치를 모를 뿐이다.”
그 순간 누군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루이 드브로이였다.
그는 잠시 인사를 건넨 뒤, 옆에 앉았다.
“박사님, 오늘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말해주신 건,
처음이군요.”
“진심입니다. 저는… 파동과 입자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을
처음 제안했을 때, 모두가 미쳤다고 했지요.
하지만 당신은 제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드브로이, 당신은 지금 양자역학이 완전하다고 보십니까?”
“완전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완전하지 않음이 어쩌면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 말에 아인슈타인은 천천히 미소 지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물음표를 닫지 않는 것.”
두 사람은 말없이 벤치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았다.
색이 바랜 노트 위에서, 잉크는 햇살 속에 어둡게 빛났다.
잠시 후, 아인슈타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그 빛이 그의 흰 머리칼과 검정 코트를 따라 흘러내렸다.
“완전하지 않은 이론 속에 완전한 진실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지요.”
“그 진실이… 변수처럼,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¹
그는 조용히 회의장으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은 단호했지만, 고독했다.
그는 그날 이후에도 여러 해석과 수학을 거부하며,
결국 ‘EPR 역설’이라는 폭탄을 세상에 남긴다. ²
하지만 그날 저녁, 그는 단 하나의 믿음을 노트에 적는다.
“물리학은 세계의 본질을 찾는 일이다.
수학이 아니라,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그것이 끝나지 않는 물음표의 시작이었다.
🧾 주석
[1] 아인슈타인은 “숨은 변수” 개념을 통해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을 넘어서고자 했다.
이 이론은 후일 ‘EPR 패러독스’로 이어지고,
벨의 정리와 함께 20세기 후반 양자논리의 핵심 갈등 중 하나가 된다.
[2] EPR 역설(Einstein–Podolsky–Rosen paradox, 1935)은
양자역학의 비국소성과 불완전성을 논리적으로 제시한 유명한 반례이다.
이 논문은 숨은 변수가 실제로 존재해야 함을 주장하며
아인슈타인의 결론을 과학계에 명확히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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