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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솔베이 회의]제4화 – 측정의 망설임과 고양이의 눈(2)

– 고양이의 숨결, 논리의 모순

🕰️ 1927년 10월 26일 오전 11시 35분
📍브뤼셀, 솔베이 연구소 회랑 복도


아인슈타인은 강당을 빠져나와 회랑을 따라 걸었다.
이 회랑은 연구소 본관을 관통해 숙소동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낮은 아치형 창들이 천천히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멈춰 벽에 기대어 섰다.
말없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강당에서 느꼈던 철학적 모욕감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때,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슈뢰딩거였다.
그 역시 회의장을 벗어나 걷고 있었고,
얼굴은 침착했지만, 눈가에는 복잡한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박사님.”
“슈뢰딩거, 아까 발표는 들으셨지요.”
“예. 불확정성의 수식은 매끄럽더군요.
하지만... 매끄럽다고 해서 진실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인슈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말처럼,
측정이 실재를 정의한다면…
우리는 세계를 믿을 이유가 사라집니다.”
슈뢰딩거는 잠시 침묵한 뒤, 조용히 말했다.

“아인슈타인 박사, 어젯밤 우리가 이야기했던 ‘고양이’ 말입니다.”
“그 상자 속 생명 말이지요.”
“오늘 아침 저는 그 구상을 정리해봤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외투 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아인슈타인에게 내밀었다.
그 종이엔 간단한 도해가 그려져 있었다.
상자, 방사성 물질, 해독약, 그리고 고양이.
측정자가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두 상태—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이 중첩되어 존재한다는 논리였다. ¹

“우리가 이 사고실험을 수용한다면,
살아 있는 생명체도 수학적 확률의 모호한 상태에 속하게 됩니다.”
“즉, 인간조차… 관측되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겠군요.”
아인슈타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에 의해 측정되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셈이지요.”
“말 그대로, 존재론의 파산입니다.”²

슈뢰딩거는 가만히 말했다.

“이것은 과학을 가장한 철학의 붕괴이며,
동시에… 철학을 가장한 과학의 독주입니다.”

그들은 회랑 끝 벤치에 조용히 앉았다.
시간은 정오에 가까워졌고,
창 밖으로는 수레를 끄는 말의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고양이는 아직도 상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열기 전까진,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런 세계가 진짜라면,”
아인슈타인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과학이라는 말을 다시 정의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 순간, 종이 위의 고양이는
더 이상 상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논리의 모순을 밝히는 도구가 되었고,
모순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가 되었다.


🧾 주석

[1] 이 장면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이
비공식적으로 구상된 시점으로 재구성되었다. 1935년 공식화되기 전까지,
슈뢰딩거는 이 논리를 동료들과 사적으로 검토한 기록이 존재한다.
[2] ‘존재론의 파산’이라는 표현은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쓴 문구는 아니지만,
그의 저술과 편지에서 유추되는 비판적 철학 입장을 드러낸 표현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중첩상태

 
 

- 측정자 없는 세계는 있는가

🕰️ 1927년 10월 26일 오후 12시 35분
📍솔베이 과학연구소 정원 옆 벤치


점심시간.
솔베이 연구소 옆 작은 정원은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파란 잔디에는 낙엽이 흩어졌고,
벤치 옆에 놓인 커다란 느티나무는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손에 슈뢰딩거가 건넨 도해 종이를 들고 있었다.
고양이는 거기 있었다.
상자 안에,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의 경계에 머물며.
그의 눈빛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것이 정말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물리학의 미래인가.”

그는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곧 누군가 그의 시야에 걸렸다.
니엘스 보어였다.
보어는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조용히 걸어왔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앞에 섰다.

“그 고양이, 아직 살아 있습니까?”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지요.”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보어를 마주 보았다.

“보어 박사, 저는 측정이라는 개념이 세계를 만든다는 주장에
깊은 불안을 느낍니다.
세계는 우리의 시선이 없어도 존재해야 하지 않습니까?”¹

보어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그런 질문은 철학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룹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불편하게 들리더라도.”

그 순간, 아인슈타인은 다시 한번 말했다.

“나는 달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내가 보지 않을 때에도.”²

보어는 고개를 들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은 과학 너머에 있는 것이겠지요.”

말이 끝났지만,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바람이 느티나무 사이로 흘렀고,
주변의 정적은 마치 고요한 무대의 장면 전환처럼 여겨졌다.


그날 오후, 다시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미 답을 찾지 못한 질문 하나를
가슴에 품은 채 발표장을 향해 걸어갔다.

“측정자 없는 세계는 존재하는가?”

그 질문은 대답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 주석 

[1] 이 장면은 아인슈타인의 편지들과 후일 발표된 인터뷰에서
자주 반복된 논점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측정이 실재를 창조한다는 주장에 일관되게 반대했다.
[2] “나는 달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내가 보지 않을 때에도.”는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한 말로,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상징적인 반박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