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지의 경계와 실재의 붕괴
🕰️ 1927년 10월 28일 오후 1시 20분
📍솔베이 연구소 회의장 외측 휴게실
회의장 바깥의 휴게실.
여기에는 더 이상 수식도, 연단도 없었다.
그 대신 깊고 피곤한 숨소리,
그리고 차가 식어가는 커피잔만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창가에 혼자 서 있었다.
그의 어깨는 아래로 처져 있었고, 눈은 어딘가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발표를 마쳤지만,
승리한 느낌은 없었다.
그는 자문했다.
“내가 만든 이론이…
나를 배신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가 파동 방정식을 만들던 시절,
그는 세계가 부드럽게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세계는 하나의 유려한 곡선이며,
그 안에서 물질과 시간은 조화롭게 파동 쳤다.
그러나 지금, 그 방정식은
무자비한 확률과 ‘붕괴’라는 말로 감싸인
깊은 불확정성의 문장이 되어 있었다. ¹
바로 그때,
볼프강 파울리가 잔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슈뢰딩거 박사, 발표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심각해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수학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아요.”
슈뢰딩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문제입니다.
수학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지만,
우리는 수학을 진실이라고 착각합니다.”
파울리는 무언가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휴게실 반대편,
아인슈타인은 창문 가까이에서 로런츠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음성은 낮고 조용했지만, 문장 하나하나는 날카로웠다.
“내가 오늘 느낀 건…
우리가 점점 세계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산은 정확해지고 있지만,
그 계산이 말해주는 세계는 점점 추상적이 되고 있습니다.”
로런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 당신은 실재를 너무 신성하게 여기고 있어요.”
“그게 잘못된 건가요?”
“그건… 물리학의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예전엔 우리가 ‘있는 것’을 다뤘다면,
지금은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것’만 다룹니다.”
“그건 후퇴입니다, 로런츠.
과학이 현실을 포기하는 순간…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 됩니다.”²
그 말에 로런츠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회의장에선 다시 벨이 울렸고,
참석자들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측정 전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측정 후엔 결정된 세계.
우리는 그 경계에서 춤추는 존재다.”
그의 눈은 빛났지만, 어딘가 피로해 보였다.
그리고 오후 늦게,
보어는 혼자 메모장에 이런 글을 적었다.
“우리는 실재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실재를 다르게 정의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엔 볼펜 자국처럼 번져 있는 잉크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치 그 문장이 적히는 순간,
그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날, 과학자들은
파동함수의 붕괴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과 직관의 붕괴를 함께 겪고 있었다.
🧾 주석
[1] 슈뢰딩거는 파동 방정식을 통해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설명하려 했지만,
코펜하겐 해석이 이를 확률로 환원하면서 철학적으로 충돌했다.
[2]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기술적 성공이자 철학적 실패라고 여겼다.
그는 과학이 존재론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면,
단순한 계산 체계로 전락한다고 우려했다.
[3]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불확정성 원리를
실재의 본성보다 ‘측정의 한계’로 해석했고,
측정 이전의 상태를 다룰 수 없다고 주장했다.
[4] 보어는 양자역학의 해석이 실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관측 가능한 것의 틀 안에서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이라 보았다.
이 철학은 후에 관측자 중심 우주론에도 영향을 준다.
– 실재를 부정할 수 있는가
🕰️ 1927년 10월 28일 오후 5시 00분
📍브뤼셀, 솔베이 연구소 서편 도서실 안 소형 열람실
도서실의 작은 열람실에는
낮은 탁자와 맞은편에 놓인 두 개의 고색창연한 가죽 의자,
그리고 창밖으로 떨어지는 주홍빛 햇살이 있었다.
그 속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가 마주 앉아 있었다.
이 방은 예정된 회의 장소도 아니었고,
그 어떤 공식 토론의 무대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들은 말로써 세상을 나누고자 했다.
“보어 박사,” 아인슈타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측정하지 않으면 존재가 정의되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저는... 인간이 관측하기 전에도
세상은 하나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¹
보어는 고개를 숙인 채, 손끝으로 책상 표면을 천천히 문질렀다.
“박사님, 우리가 다루는 세계는
고전역학의 직관으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양자 세계는... 우리가 익숙하던 실재의 틀을 넘어섭니다.”
“그럼 당신은 실재란 없다고 보십니까?”
아인슈타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실재는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자연은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오직 측정 가능성으로만 규정할 수 있습니다.”²
아인슈타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창문 바깥, 저무는 브뤼셀의 하늘을 향했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게 두렵습니다.”
보어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두렵다고요?”
“우리가 결국,
세계를 잃어버리게 될까 봐.
실재를 포기한 과학은...
결국 인간을 고립시킵니다.”
그 말에 보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실재를 믿는 겁니까?”
“내가 믿는 건, 질서입니다.
세계는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 할 때,
과학이 의미를 가집니다.”³
“그리고 지금의 이론은…
그 질서를 찾으려 하지 않고,
관측된 결과만을 붙잡고 있지요.”
보어는 그 말에 깊은숨을 내쉬었다.
“박사님,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누가 옳습니까?”
“모릅니다.”
“단지, 지금은 이 해석이 실험과 일치할 뿐입니다.”
그 말에 아인슈타인은 웃었다.
“하지만 진실은 항상 실험보다 깊은 곳에 있지요.”
그날 밤, 회의는 끝이 났다.
사진촬영이 있었고, 과학자들은 웃으며 나란히 섰다.
하지만 사진 속 인물들의 눈빛은 다채로웠다.
어떤 이는 만족했고,
어떤 이는 싸움의 시작을 직감했고,
어떤 이는 아직도 설명되지 않은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아직 세계가 하나의 상태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관측되든, 되지 않든.”
그는 싸움을 끝내지 않았다.
그는 EPR 역설로, 벨의 정리로,
그리고 실재에 대한 믿음으로 그 싸움을 이어나갔다.⁴
🧾 주석
[1] 아인슈타인의 입장은 ‘실재론(Realism)’으로 요약된다.
그는 관측과 관계없이 세계는 하나의 객관적 상태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2] 보어는 ‘관측 가능성’의 개념을 강조하면서,
물리학은 본질적으로 실재 자체가 아니라
관측 가능한 결과에 대한 논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3]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은 자연 속 질서를 파악하려는 작업이라 보았으며,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말은 그 질서에 대한 강한 믿음을 나타낸다.
[4] 1935년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이 발표한 ‘EPR 논문’은
양자역학의 비국소성과 불완전성을 지적하며
숨은 변수 이론의 정당성을 제기한 대표적 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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