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하는 도시, 불 꺼지지 않는 질문
🕰️ 1927년 10월 25일 저녁 6시 45분
📍브뤼셀, 솔베이 과학연구소 숙소동 2층, 아인슈타인의 방
가을비가 멎은 브뤼셀의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정적이 짙게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전등은 아직 희미했고, 거리엔 전차의 궤도만이 차가운 쇳소리를 울리며 지나갔다.
그마저도 끊긴 순간, 도시 전체가 숨을 죽인 듯했다.
아인슈타인은 창가에 선 채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 아래 좁은 골목길은 돌로 포장되어 있어 습기를 머금은 회색이었고,
행인들은 대부분 코트를 여미며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갔다.
연구소 본관의 불은 이미 꺼졌지만, 숙소 복도 너머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느릿하게 오갔다.
그는 창문을 손끝으로 짧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하루만 해도 세 번은 똑같은 물음을 되뇌었다.
"관측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로 가능한가?"
이 질문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그가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과학적 신념 전체를 흔드는 것이었다.
실재는 존재한다.
그는 늘 그렇게 믿었다.
비록 그것이 관측되지 않더라도, 그 존재는 독립적으로 거기 있어야 했다.
책상 위에는 회의용으로 나눠준 요약자료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그의 자필로 빼곡히 덧댄 수식과 문장이 흘러나와 있었다.
가장 진하게 덧칠된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Spukhafte Fernwirkung – 유령 같은 작용.”
그는 이 독일어 표현을 반복해 적었다 지우기를 여러 번 반복했지만,
아직도 이 표현이 자신에게 너무 감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표현이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양자역학이 설명하지 못한 것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가 아침에 발표했던 ‘비국소성’은
곧장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적 반격에 부딪혔다.
그들은 ‘실재’를 다루려는 시도 자체가 낡은 관념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측정 이전에 세계가 어떤 상태였는지는 물을 수 없으며,
오직 측정된 결과만이 의미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달은 내가 쳐다보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¹
그는 이 물음을 그 자리에서 단 한 사람에게 말한 적 있었다.
바로 보어였다.
그러나 보어는 그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짧게 대답했다.
“달을 이야기하는 순간, 당신은 고전적 사유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말이 여전히 가슴 어딘가에 남아있었다.
분명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이미 많은 이들에겐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숙소 복도에서는 누군가의 발걸음이 다시금 지나갔다.
잠시 후, 낮게 노크 소리가 났다.
아인슈타인은 고개를 돌렸다.
시계를 보니 저녁 6시 55분.
회의 일정은 없었고, 슈뢰딩거나 파울리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가 문을 열자,
조용한 인물이 서 있었다.
검은 코트에 체구가 자그마한 니엘스 보어였다.
모자에 젖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안갯속을 걸어왔는지 그의 어깨에도 이슬이 앉아 있었다.
“보어 박사...”
“괜찮으시다면, 오늘 밤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을까요?”
아인슈타인은 조용히 문을 열어젖혔다.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같은 논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방은 의외로 단정했다.
책상이 벽 한가운데에 있었고, 의자 두 개, 찻잔 하나, 작은 기름난로가 있을 뿐이었다.
보어는 방 안을 조용히 둘러보다가 창가에 다가섰다.
그는 잠시 침묵한 뒤, 조용히 말했다.
“오늘 발표하신 내용, 저는 깊이 공감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진지한 질문은, 제가 외면할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화는 공격이 아닌 탐색이었다.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관이 조심스럽게 서로를 만지듯이.
“보어 박사, 나는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실재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믿음 아닐까요?”²
그들은 그 밤, 다른 어떤 실험 장비보다도 섬세한 도구—‘언어’—를 들고,
이해라는 실험에 뛰어들고 있었다.
🧾 주석
[1]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반박 중 하나로, “달은 내가 보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그가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을 반박할 때 인용한 표현이다.
[2] 보어의 철학은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이 의미 있다”**는 실증주의적 입장을 따른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실재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3] 실제 회의 후, 보어는 아인슈타인과 장시간의 비공식 토론을 밤마다 이어갔다는 사료가 있다. 이 토론은 20세기 과학사에서 가장 철학적인 대결로 기록된다.

– 불협화음 속의 대화
🕰️ 1927년 10월 25일 오후 7시 25분
📍브뤼셀, 솔베이 숙소동, 아인슈타인의 방 – 응접 테이블 앞
방 안은 적막했다.
작은 기름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김이 피어오르며, 공간을 따뜻하게 메웠다.
아인슈타인은 벽장 아래서 잎차를 꺼내며 물었다.
“보어 박사, 물리학은 설명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기술의 학문입니까?”
보어는 차를 따르며 천천히 말했다.
“저는 언제나 기술(description)의 관점에서 생각해왔습니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¹
아인슈타인은 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브뤼셀의 밤은 안갯속에서 가로등 빛을 퍼뜨리고 있었고,
그 희미한 금빛이 유리를 스치듯 깜빡였다.
“하지만 그 ‘말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린 허상을 기술하는 셈 아닙니까?”
보어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늘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고전 개념의 언어를 사용해 양자현상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언어는 양자현상의 전모를 담기에 부족하죠.”²
“언어가 부족하다면,” 아인슈타인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언어를 바꿔야지, 세계를 부정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관측을 통해서만 세계를 알 수 있다면,
그 관측 자체가 실재를 결정짓는 유일한 경로일지도 모릅니다.”
보어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어나갔다.
“양자역학은 이상한 수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관찰 결과를 기반으로 한 철저한 수학이죠.
측정 결과가 확률적으로만 주어진다는 사실은—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확률은 무지의 표현일 뿐입니다.”
아인슈타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우리가 상태를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확률로 나타내는 것이지요.
실재는 그 확률 바깥에 존재해야 합니다.”³
보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이내 자신이 가져온 노트를 펴고,
거기에 파동함수 Ψ와 상태 벡터를 손으로 간단히 그려 보였다.
“이 Ψ는 실재입니까?”
“수학적으로는 정의된 개념입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이 Ψ가 측정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측정 가능한 건, Ψ의 제곱인 확률 밀도 뿐이지요.”
보어가 종이에 덧그으며 말했다.
“Ψ는 완전한 상태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지식의 총합일 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말을 듣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군요.
존재하는 건, 우리가 그것을 측정할 때 나타나는 것뿐.”
보어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대화는 마치 악보 없이 연주되는 즉흥곡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악기와 조율법이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같은 곡을 완성하려는 의지를 거두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보지 못한 세계를
상대방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 주석
[1] 보어는 과학의 목적을 ‘자연의 기술(description)’이라 규정하며,
실재(reality)보다는 관찰된 현상에 대한 예측과 일관성을 중시했다.
[2] 보어는 고전 개념—입자, 궤도, 위치, 운동량 등—으로 양자 세계를 설명하는 데 한계를 느꼈으며,
이를 “고전 언어의 불충분성”이라 불렀다.
[3]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은 확률을 불완전한 정보로 간주하며,
더 깊은 층의 결정론적 이론이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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