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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솔베이 회의]제2화 – 유령처럼 작동하는 세계(1)

– 흐릿한 아침, 선명해지는 질문

🕰️ 1927년 10월 25일 오전 7시 40분
📍브뤼셀, 솔베이 과학연구소 맞은편 숙소동
브뤼셀의 아침은 여전히 흐렸다.
가을비가 밤사이 내렸다가 멎은 듯, 거리에는 희미한 물비늘 자국이 선명했고, 습기가 벽돌 사이로 스며들어 길가의 이끼는 더욱 짙은 초록빛을 띠었다.
솔베이 연구소 맞은편에 위치한 숙소동 2층 창가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의 탁자 위에는 전날 회의 때 나눠준 인쇄물과, 자필로 쓴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Spukhafte Fernwirkung.”
유령 같은 원격작용.[1]

그는 이 단어를 써놓고 몇 초간 바라보다가, 마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검은 연필로 그것을 진하게 덧그었다.
그리고 옆에 작게 적었다.

“실재는 거리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에르빈 슈뢰딩거가 서 있었다. 그는 여전히 길게 풀어 올린 울 코트를 입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아인슈타인 박사, 아직 식사 전이시죠?”
“내겐 커피와 회의록이 아침이지요.”
“그 커피는 식었을 텐데요.”

슈뢰딩거는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탁자 위의 노트를 훑어보던 그는, 한 문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령 같은 작용이라... 점점 문학적인 표현이 되가는데요.”
“그럴 수밖에. 수학은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해주지 않아.”

아인슈타인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슈뢰딩거도 맞은편에 앉아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그 안에는 어젯밤 정리한 사고실험 초안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아직 꺼내진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덮었다.

“보어의 해석이 이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측정 이전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밖에서는 이른 시각인데도 몇몇 마차가 오가며 짧은 쇠 바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재란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은 커피잔을 입에 댄 채 중얼거렸다.

“관측을 하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2]


🧾 주석 

[1] "Spukhafte Fernwirkung"은 아인슈타인이 양자 얽힘(Entanglement)을 비판하며 쓴 독일어 표현으로,
훗날 영어로 'spooky action at a distance'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2] 아인슈타인은 관측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어의 입장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으며,
“달은 우리가 쳐다보지 않을 때도 존재하는가?”라는 비유로 반박했다.
이는 그의 실재론적 입장을 대표하는 인용문이다.

학회 발표 참고 이미지

 

– 유령 같은 작용, 아인슈타인의 발표

🕰️ 1927년 10월 25일 오전 9시 00분
📍솔베이 과학연구소 제1회의실
회의장의 가스등이 서서히 꺼지며, 가을 햇살이 회의실 내부로 번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중후한 고전주의 장식이 있는 천장 아래, 길게 늘어선 목제 의자에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조용히 앉아 서로를 견제하듯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오늘 오전의 발표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의 이름이 로렌츠의 목소리를 통해 불리자, 방 안의 미세한 공기 흐름이 바뀌는 듯했다.

“다음 발표는 아인슈타인 박사입니다. 주제는 ‘양자 상태의 완전성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필기 노트와 자료 몇 장을 챙겨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참석자들을 둘러보고,
칠판 앞에 서서 분필로 단순한 선을 하나 그었다.
두 개의 입자가 같은 원점에서 출발해, 정반대 방향으로 흩어지는 도식이었다.

“생각해보십시오. 두 입자가 상호작용 후 멀리 떨어졌다고 가정합시다.
이 둘은 이후에도 여전히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1]

그는 선명하게 분필을 내려놓으며, 회의장을 응시했다.

“우리가 한 입자의 상태를 측정하면,
다른 입자의 상태를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수학적으로는 맞지만,
물리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다음과 같은 단어를 꺼냈다.

Spukhafte Fernwirkung. 유령 같은 원격작용.”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좌중에는 적막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이젠베르크는 눈살을 찌푸렸고,
보어는 팔짱을 낀 채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양자역학은 입자 간의 이런 상관관계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상관관계는 즉각적이며, 거리와 무관하게 작용합니다.
이것이 ‘설명 가능한 물리 법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까?”[2]

그는 걸음을 옮기며 작은 종이 한 장을 들었다.
거기엔 간단한 수식이 적혀 있었고, 그는 그것을 참석자들에게 펼쳐 보였다.

“현재 양자역학은 이런 비국소적 연결을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설명의 실패라고 봅니다.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가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내뱉었다.

“측정 이전에도 입자는 실재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3]

이 말은 어젯밤, 슈뢰딩거와 나누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철학적으로 자신이 서 있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니엘스 보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요했던 회의장이 살짝 술렁였고, 몇몇이 고개를 돌렸다.
보어는 칠판으로 다가가더니,
아인슈타인이 그린 입자 그림 옆에 자신만의 곡선을 덧붙였다.
그리고 분필로 이렇게 적었다.

“Ψ = α|0⟩ + β|1⟩”

그는 설명을 시작했다.

“이것이 양자 상태입니다.
Ψ는 하나의 확률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상태의 **중첩(superposition)**입니다.
측정은 이 중첩을 **하나의 결과로 붕괴(collapse)**시키는 물리적 작용입니다.”[4]

아인슈타인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보어는 말을 이었다.

“실재란 우리가 측정하기 전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하는 그 순간 발생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리학은 ‘존재’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현상에 대한 기술이어야 합니다.”[5]

두 사람 사이에 짙은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회의장은 물리학이 아니라 철학을 논의하는 강의실처럼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 긴장된 공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이 회의의 진짜 무게였기 때문이다.


🧾 주석 

[1] 아인슈타인의 이 비판은 1935년 EPR(Einstein-Podolsky-Rosen) 역설로 정리되며, 양자역학의 비국소성 문제를 전면에 드러낸다.
[2] 양자 얽힘(Entanglement)은 두 입자가 거리와 관계없이 물리적으로 상호 연결돼 있다는 현상으로,
고전물리학의 국소성(locality) 원칙과 충돌한다.
[3] 이는 **실재론(Realism)**의 핵심 주장이다. 관측과 무관하게 실재는 존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4] 파동함수의 붕괴는 양자 측정 이론의 핵심 개념이며,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측정이 현실을 결정한다고 본다.
[5] 보어는 과학의 목적이 실재의 정의가 아니라, 현상의 일관된 설명에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