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물리학 역사상 양자역학의 탄생을 알린 가장 위대한 학회를 배경으로, 실제 역사와 인물을 바탕으로 창작한 드라마입니다.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격동의 시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주석을 참고하시면서,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양자역학의 세계에 어느새 빠져 있을것입니다.
목차
1화 안개 속의 도착과 코펜하겐의 선언
2화 유령처럼 작동하는 세계
3화 코펜하겐 대 브뤼의 밤, “두 철학이 마주 앉다”
4화 측정의 망설임과 고양이의 눈
5화 숨겨진 변수들, 보이지 않는 세계
6화 파동함수 붕괴와 실재의 경계선
7화 EPR 역설과 벨의 도전
– 벨기에의 안개와 천재들의 도착
1927년 10월 23일, 일요일 저녁.
브뤼셀 중앙역에는 기차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금빛 가스등이 하얗게 번지는 안개 속에서, 플랫폼은 연기와 김서린 입김으로 가득했다. 벨기에 특유의 조심스러운 침묵이 대합실을 감싸고 있었고, 몇몇 승객은 양복 윗깃을 세운 채 증기를 내뿜는 기관차 곁을 서성이고 있었다. 마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며 기차역 앞을 지나갔다[¹].
역 대합실을 통과해 플랫폼으로 들어선 한 인물이 있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등이 곧고 이마가 넓었으며, 짙은 울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역사의 유리문을 열며, 자신의 발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걸었다.
그는 막스 플랑크였다. 이제는 독일 물리학계의 원로가 된 인물.
20세기 초, 그가 무심코 꺼낸 ‘양자’란 개념이 세상을 뒤집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뒤를 쫓아오는 젊은 세대의 사고를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쥔 초청장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나는 이 세계를 열었지만, 닫을 방법은 없군.”
그의 속삭임은 습기 찬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곧이어 플랫폼 반대편에서 두 번째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빛 코트를 걸치고, 둥근 모자를 쓴 그는 빠르게 걸었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었으며, 코트 주머니에는 작은 수첩이 들어 있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미 세계적 명성을 지닌 그는, 이 회의에 누구보다 뜨거운 의문을 안고 왔다. 브뤼셀의 안개와는 별개로, 그의 내면에는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철학이 구름처럼 맴돌고 있었다.
“실재가 관측에 좌우된다면, 그건 더 이상 실재가 아니지.”[²]
그는 중얼이며 노트에 펜으로 단어 하나를 적었다.
"Realität ohne Beobachtung", 관측 없는 실재.
역사 앞에는 기다리고 있던 고풍스러운 마차가 줄지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문을 열고 플랑크와 마주 보게 앉았다. 마부는 그들의 이름이 적힌 패를 확인하고, 손목을 까딱이며 말을 몰았다. 말발굽 소리가 자갈 위로 번져나갔다.
도시에는 전기등과 가스등이 혼재하고 있었다. 낮은 담벼락 아래에는 철로가 깔려 있었고, 간간이 철제 전차가 덜컥이며 지나갔다. 시민들은 어두운 회색 외투를 걸치고, 대부분 고요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내일 시작될 회의는 단순한 과학 행사가 아니었다.
이건 존재론과 인식론이 물리학이라는 이름 아래 정면충돌하는 사건이었다[³].
그들이 도착한 목적지는 솔베이 과학연구소. 벨기에 산업가 어네스트 솔베이가 세운 이곳은,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초대해 토론을 벌이는 특별한 장소였다. 안뜰엔 석탄 냄새가 가득했고, 건물 벽은 짙은 회색 석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문이 열리자 촛불과 가스등이 결합된 조명이 희미하게 복도를 비췄다.
그보다 조금 늦게, 또 한 명의 인물이 연구소 앞에 도착했다. 덴마크 국적의 젊은 물리학자. 검은색 챙 넓은 모자, 단정한 머리, 그리고 고요한 눈빛. 그는 잠시 건물 외벽을 바라보다가 들어섰다.
니엘스 보어였다. 그에겐 내일 발표할 내용이 있었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가져온 자신만의 ‘세계관’을 꺼내 보일 참이었다.
“불확정성 속에 진실이 있다. 우리는 그걸 해석할 뿐이다.”[⁴]
그가 방으로 향할 때, 복도 어귀에서 마주친 이는 하이젠베르크였다.
둘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미 오랜 논의로 통하는 사이였다.
밤은 깊어졌고, 솔베이 연구소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아래엔, 다가올 폭풍의 진동이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 [주석]
[¹] 1927년 당시 브뤼셀 시내의 주요 교통수단은 마차, 노면전차, 자전거 등이었으며, 자동차는 일부 부유층이 소유한 수준이었다.
[²] 아인슈타인은 일관되게 “관측 없는 실재”를 강조하며 양자역학의 비결정성을 비판했다.
[³] 제5회 솔베이 회의는 단순한 과학적 토론을 넘어 물리학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기반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 대표적인 사건이다.
[⁴] 보어는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으로, 확률적 해석과 관측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 코펜하겐 해석의 발표
1927년 10월 24일 오전 9시 정각.
솔베이 과학연구소의 회의실은 마치 법정처럼 정숙한 분위기였다.
벽에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천장에는 조명이 희미하게 퍼지고 있었다.
흰색 분필가루가 묻은 칠판이 중앙에 놓였고, 주변에는 반원 형태로 배열된 테이블과 의자들이 자리했다. 각 자리에는 참석자들의 명패와 물컵, 수첩이 정돈되어 있었다.
출입문이 열리자, 로렌츠가 회의의 사회자로서 단상에 올랐다.
회색 콧수염을 정돈한 그는 짧게 회의를 개막하며, 첫 번째 발표자를 소개했다.
“첫 번째 발표자는 니엘스 보어 박사입니다. ‘양자 현상의 해석’이라는 주제를 통해 새로운 물리학적 시야를 제시할 예정입니다.”[¹]
보어는 느린 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손에는 얇은 노트 한 권과 짧은 연필 한 자루.
그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곧바로 칠판 앞에 섰다.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단순한 수식이나 계산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의 성격’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분필로 칠판에 단순한 그림을 그렸다.
두 개의 좁은 틈, 그리고 그를 통과하는 입자.
“이중 슬릿 실험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입자는 언제 파동이고, 언제 입자인가?'”[²]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측정을 하지 않으면, 입자는 파동처럼 간섭무늬를 만듭니다. 하지만 측정 장비를 두고 입자의 위치를 관찰하면, 간섭무늬는 사라지고 입자는 하나의 점으로 나타납니다.”
“즉, 입자의 성격은 우리가 측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³]
보어는 분필을 잠시 내려놓고,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의자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었고, 슈뢰딩거는 메모를 하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어는 말을 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단순히 관측이 계의 상태를 ‘방해’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측정 이전에는, 입자의 상태가 정의되지 않는다.
그 상태는 여러 가능성이 중첩된 상태에 있으며, 측정이라는 행위가 그 중 하나로 ‘결정짓는’ 순간입니다.”
보어는 조용히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단호하게 마지막 문장을 던졌다.
“실재는 본질적으로 확률적입니다.
관측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⁴]
회의실엔 정적이 흘렀다.
그 말은, 고전물리학이 믿었던 ‘객관적 실재’의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선언이었다.
이 침묵을 가장 날카롭게 받아들인 이는, 역시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⁵]
그 속삭임은 매우 낮았지만, 보어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얼굴을 돌려 아인슈타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처음으로 충돌했다.
그 순간, 회의실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이날의 주제는 실험적 발표가 아니었다.
이건 물리학자들이 공유하던 현실 인식 자체를 재정의하려는 시도였다.
🧾 [주석]
[¹] 헤이케 카메를링 오네스, 헨드릭 로렌츠 등은 솔베이 회의의 사회 및 진행을 맡았으며, 로렌츠는 1927년 회의의 공식 의장이다.
[²] 이중 슬릿 실험은 입자-파동 이중성, 관측 문제, 중첩과 붕괴 개념을 포함하는 양자역학의 대표적 실험이다.
[³] 측정의 행위는 계와 장비 간 상호작용이며, 이를 통해 입자의 상태는 결정된다. 이는 보어의 해석 중심 개념이다.
[⁴] 보어의 “관측 없는 실재는 없다”는 철학은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으로, 인식론적 전제를 과학에 적용한 예다.
[⁵]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Gott würfelt nicht)”는 발언은 결정론적 우주관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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